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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바퀴에서의 탈출을 위한 휴가, 당연함에 비판을 가해보자!

쳇바퀴 마냥 돌아가던 일상 속에서 벗어날 여유, ‘휴가’. 잠시의 여유로움에 빠진 당신, 쳇바퀴 같지만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해 왔던 우리의 삶 그리고 많은 ‘당연함’에 대해 한 발짝 물러서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 무엇이 나를 쳇바퀴 속 다람쥐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는가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의 시간. 이는 휴가 후의 당신을 쳇바퀴 속 다람쥐가 아닌 자유로운 다람쥐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여성만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이자 남성은 가부장제의 가해자로 여겨왔던 우리의 사고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일맥상통하는 오해임을 깨닫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그 오해를 풀어주며 동시에 우리가 ‘당연시’ 여긴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시간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남성, 그들도 가부장제의 피해자 영화 「빌리 엘리어트」
영화 ‘빌리 엘리어트
대다수 사람들은 ‘가부장제’란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 받는 제도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가부장제’는 여성뿐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는 우위적 존재로 인식되었던 남성 또한 억압의 대상으로 본다. 즉 실제로 ‘가부장제’ 내의 억압의 주체도 대상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상황적 배경 속에서 억압의 주체와 대상이 정해지는 것이란 시각이다.
이러한 사고를 담은 대표적인 영화 <빌리 엘리어트>. 영화 속 주인공 빌리는 가부장적 사고가 만연하고 있는 동네에서도 특히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사고가 지배적인 가장 아버지와 형 그리고 ‘여성’이지만 온전치 못한 여성으로 비추어지는 할머니와 한 지붕 아래 살아간다. 이와 같은 상황 설정은 극적인 가부장적 가정을 만듦으로서 빌리가 가부장적 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춤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만 있었던 빌리는 다니던 권투도장에서 우연한 계기로 인해 발레수업도 열리게 되자 그 호기심이 춤에 대한 열정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가부장적 사고가 만연한 동네에서도 가장 가부장의 전형인 아버지를 둔 빌리에게 자신의 열정인 발레는 마치 금기된 것에 대한 저항과도 같은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금기 보다 자신의 발레에 대한 열정이 강함을 깨달은 빌리는 몰래 윌킨스씨(이 영화의 유일한 여성이자 발레강사)의 발레수업을 듣는 모험을 한다. 돌아가신 엄마의 부재로 인해 아프신 할머니를 보살피고 집안일도 병행해야 했던 빌리는 발레를 시작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도 잠시, 광부로서 파업을 하던 아버지와 형에게 발레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서 빌리는 가족과의 큰 갈등을 겪게 된다.
이는 남성 또한 여성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중규범에서 ‘성역할’을 억압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강한 남성으로 ‘발레는 여자들이 하는 것이 정상이고 남자는 축구, 권투, 레슬링과 같은 운동을 하는 게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아버지에게 남성성을 억압 받으며 ‘여성’의 운동이라 치부되는 발레를 배울 기회조차 제재 받는 빌리. 따라서 이는 가부장적 사회 내에서 남성 또한 이중규범에 의해 억압 받아 갈등을 겪고 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형의 갈등 속에서의 괴로움마저 탭댄스로 표현할 만큼 춤에 대한 열정이 컸던 빌리는 이 열정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발레에 대한 빌리의 끝없는 열정과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는 끝내 자신의 마음을 돌리고 빌리를 지원하고자 한다. 탄광촌에서 자라 광부로서 일하며 자신의 큰 아들에게도 광부라는 직업을 대물려주었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여성적이긴 해도 ‘발레’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작은 아들 빌리에게 만은 힘든 광부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마음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파업으로 인해 돈을 벌지 못하는 날이 길어지면서 아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유품인 피아노마저 땔감으로 써야했던 아버지는 빌리를 지원해 주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빌리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파업의 지도자인 큰 아들 몰래 노조를 나와 작업 현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다 큰 아들에게 사실을 들킨 아버지는 큰 아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책한다. 이에 빌리의 형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돌아가신 엄마의 입장에서 그 또한 빌리를 지원하고자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다른 부업을 찾는다.

파업 중인 광부들의 모습
여기서 나타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란 바로 ‘남성’이 ‘가족애’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가부장적 사고가 지배하는 가족관계지만 ‘남성’인 아버지와 형은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이며 여성적 면모를 지닌 빌리를 가족애로써 이해하고 그를 지지하려고 한다. 이처럼 ‘남성이 여성의 문제를 가족애의 확장 차원에서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우위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을 이해한다.‘라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연속에 다름 아니다. 또한 영화 속 빌리 가정에는 ‘온전한 여성’의 부재라는 전제가 있는데, 아버지가 여성 발레강사로부터의 경제적 지원 제의를 거절하며 ‘자신이 알아서 부담하겠다.’고 행동하는 모습을 통해 ‘경제적인 문제는 남성이 해결해야한다.’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엿보게 한다. 이는 가부장적 사고가 남성에게 ‘책임’이라는 올가미를 씌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경제적 지원을 해줄만한 능력이 있는 ‘여성’의 호의를 '남성'은 가부장적 사고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거절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강인하고도 독립적인 존재로서 남성은 여성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 의무’ 속에 가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특히 이 부분은 가족의 땀에 의한 경제적 뒷받침과 자신의 열정으로 드디어 빌리가 로열 발레학교 진학시험에 합격한 후 아버지와 형의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난다. 합격의 기쁨은 노조의 항복으로 인해 일터로 다시 나가야 한다는 대조적 상황으로 인해 환영받지 못한다. 빌리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위해 아버지와 형은 일터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게 된다. 이때 카메라는 갱내 엘리베이터 안에 마치 성냥갑 속의 성냥마냥 빼곡하게 들어선 아버지들의 표정 없는 모습을 비춰준다. 각 가정마다의 가부장적 가장들 모습이다. 즉 ‘가장으로서 가족 부양에 대한 의무’라는 철장 안에 갇힌 가부장적 사회 속 ‘남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빌리 엘리어트>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양산한 이중규범에 의해 강요되는 남성성으로 억압 받는 한 ‘남성’의 꿈, 가부장적 사회 내에서의 ‘책임’에 갇힌 ‘남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빌리는 ‘백조의 호수’ 음악에 맞춰 하늘을 날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이중규범에서 자유로워지지만 아버지와 형은 가부장적 ‘책임’이라는 철장 안에 다시 갇히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빌리가 ‘백조의 호수’음악에 맞춰 하늘을 나는 모습
어떠한 문제이든 사회 구성원의 사고의 전환이 없으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우리 사회의 주류로 굳어진 가부장적 사고란 더욱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빌리가 하늘을 나르며 해방을 그리고 있듯이, 그 탈출구가 봉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역들과 가까운 미래에 사회를 이끌어 갈 우리부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사고에서 자유로워지는 날이 다가오리라 본다.
글&사진 위민기자 문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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